“감정도 대행해드립니다”
“감정도 대행해드립니다”
  • 이윤주 기자 (skyavenue@the-pr.co.kr)
  • 승인 2016.07.1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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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사과, 반성, 이별까지 ‘타인의 손’으로

“인터넷으로 키배(키보드 배틀)뜨다가 현피(실제로 만나 싸우는 행위)까지 잡았는데, 막상 싸우려니 아픈 건 싫고 이길 자신도 없고, 근데 지는 건 더 싫어서 신청했다. 이런 황당한 대행도 해주시고 감사해요.”-싸움대행-

“제가 친딸이 아님에도 나중에는 눈물까지 글썽이시는 모습에 너무 감동받았습니다. 그동안의 세월이 너무 서러워서 지금도 살짝 눈물이 나네요.”-역할대행-

“오늘 오신 직원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자 글 남깁니다. 정말 보는 제가 너무 미안했습니다. 저 때문에 정말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사과대행-

[더피알=이윤주 기자] 길을 걷다가 어떤 여자에게 이별을 대신 통보해달라고 부탁받은 남자. 직접 대면한 채 헤어짐의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착안해 대행업에 뛰어든다. 어느 날 불치병에 걸린 엄마와의 이별을 원치 않아 대신 작별해달라는 꼬마가 찾아온다.

영화 ‘새드무비’의 일부분이다. 무비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역할대행은 물론 설득, 사과, 이별 등 감정도 타인의 손에 맡기는 시대가 됐다.

▲ 영화 ‘새드무비’ 중 정하성 역 차태현은 이별을 대행하며 별별 일을 다 겪는다.

한 대행업체 사이트에 올라온 이용후기다.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싸움, ~척, 사과에 이르기까지 ‘대행서비스’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관련 업체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행’이라고 검색만 해도 수십 군데가 뜬다. 모두 비슷비슷한 카테고리를 내걸고 운영 중이다.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고 싶을 때, 욕 대신 듣기, 질책 대신 받아주기, 가격 인하 협상 대신해주기, 운동 져주기, 영웅 만들어주기 등 생활 속에서 ‘누군가 대신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만한 것들이다.

13년째 대행업체를 운영 중인 관리자 ㄱ씨는 자신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해본 사람일 것이라고 소개했다. 2000년대 초반 심부름센터에서 역할대행업체가 독립했고, 현재는 돈만 받으면 웬만한 모든 것은 다 맡는다고 했다. 심부름업체가 100만원 단위로 미행, 뒷조사 등 비교적 음지의 큰 의뢰를 받는다면, 대행업은 10만원 단위로 일상 속에서 난감한 순간을 대신하는 축소된 개념이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행서비스를 이용하면 비용 지불을 통해 익명성을 보장받고 직접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자신의 행위에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서 “사람들과 대면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 사회에서 정서적인 압박감을 벗어나기 위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배달서비스가 일종의 감정배달의 영역까지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욕 듣고 싹싹 빌고…평균 20만원

그렇다면 감정대행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ㄱ씨는 자신이 직접 맡았던 의뢰 경험담을 들려줬다. “(폭력 사건과 관련) 사과의뢰를 맡았을 때 무릎을 꿇고 싹싹 빈 적이 있었다. 이렇게 사과하면 그래도 변호사를 부른다는 사람과 용서해주겠다는 사람으로 나뉜다. 상대방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기 마련이다.”

이같은 감정대행은 상대방이 업체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의뢰인과 대행자간 사전 입맞춤은 필수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한 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하려 노력한다.

실제로 대행업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성업 중인 서비스업체에 연락해봤다. ‘이별대행’으로 몇 달간 교제한 애인과 헤어지고 싶다며 이용방법을 문의했다. 그러자 “각본, 인물설정, 대본을 주시면 그대로 진행해 드린다”며 “대행컨설팅은 따로 해드리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즉, 대행업체는 연기만 해주고 시나리오는 본인이 직접 짜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 대면으로 나서는 데 드는 비용은 평균 20만원이라고 했다.

다른 대행업체에 이번엔 화해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문의했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을 하던 중 “처음이세요?”라는 질문이 있었다. 이 업체는 “단골이 확보돼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받을 이유가 없다”며 “신생업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으니 그곳에 연락하라”고 말했다. 대행업 시장은 어느 정도 자리 잡았고 이용자들이 다시 찾는 것으로 풀이된다.

대행서비스는 아직 사람들에게 친숙한 서비스는 아니다. 5년째 영업 중인 P센터의 관리자 ㄴ씨는 “아직은 대행서비스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많다. 그나마 드라마에서 결혼식 하객 대행 같은 이야기들이 몇 번 언급돼 많이 알려진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전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일처리가 어렵고, 난처할 때가 있지 않나. 이런 사소한 것들을 해결해주는 것으로 사립탐정과 같다고 보면 된다”는 설명이다.

SNS 소통에 익숙한 현대인, 공감능력 떨어져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대신 써주겠다는 대필업체도 있다. 진심이 담긴 글이 말보다 낫다는 D업체는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대필인의 이력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라디오 메인작가, 취재기자, 철학과 졸업 등 이력은 나름 화려하지만 인터넷상에서 익명성을 기반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대부분의 대필서비스는 A4용지 2장 이내로 이뤄진다. 작업 소요시간은 2~4일이며, 가격은 10만원 안팎. 종류도 CEO 연설문, 탄원서, 직장인 독후감, 논문 등 글로 쓸 수 있는 것은 뭐든 가능하다. 이중에는 탄원서나 편지처럼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하는 글도 포함돼 있다.

‘대필의 필수조건’에 대해 나열한 업체도 있다. △의뢰자가 의도하는 뜻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의뢰자가 미처 못다 한 얘기도 유추해야 한다 △의뢰자가 얘기의 경중에 따라 적절히 배열해야 한다 △의뢰자의 감성과 개성이 살아있어야 한다 △의뢰자가 뜻이 온전히 전해지도록 표현해야 한다 등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감정을 표현해야할 사람은 돈으로 감정을 숨기고, 대필자가 대신 상황에 공감하면서 글을 작성한다는 사실이다.

신성만 한동대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현대인들은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간접의사소통만 하다 보니 직접 소통 역량이 부족해졌다”면서 “이것을 대행서비스로 대체하려는 것”이라고 봤다. 직접 반려동물도 길러보고 냄새도 맡아보는 등 통합적인 직접경험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들이 결여돼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최근 정신질환분류법에는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Social Communication Disorder)’가 새로 추가됐다. 이 장애는 사회생활에서 의사소통 기술이 부족해 언어적, 비언어적 어려움을 겪는 현상이다. 신 교수는 “책을 읽지 않아 맥락을 이해는 자질이 부족해진 탓도 크다”며 “결국 사회 지수(SQ)가 떨어져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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